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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Author: 김미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30 20:01:16

“야, 주해이 너 집에 꿀 발라 놨냐?”

“뭐가”

도원은 요새 들어 술자리를 마다하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가는 제 친구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너 솔직하게 말해. 여자 친구 생겼지? 집에 여자 친구 감춰 놨지?”

“또 이상한 소리 한다.”

“뭐야? 주해이 여자 친구 생겼어?”

“진짜? 누군데? 저번에 이도원이 소개해 준다던 그 애?”

도원의 목소리가 거의 확성기 수준이라 함께 체력 훈련을 받던 학생들이라면 못 들으려야 못 들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고된 훈련으로 지쳐 있었던 찰나에 도파민 도는 연애사 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해이와 도원이 있는 쪽으로 몰려들었다.

“야, 어떻게 생겼는데? 좀 보여줘 봐.”

“뭔 소리야. 여자 친구 없어. 이도원이 괜히 설레발친 거야.”

“뭘 또 감추냐.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

졸지에 여자 친구가 생긴 뒤로 친구와 술 한 잔도 함께 마시지 않는 의리 없고 꼴사나운 사내가 되었다. 결국엔 도원의 손에 이끌려 과 동기 모임에 참석하게 된 그는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며 제 친구를 아니꼽게 응시했다.

“뭘 또 그렇게 쳐다봐. 내가 오해하긴 했지만, 그동안 네가 우리랑 안 놀아준 건 사실이잖아.”

“군 입소는 언제 한다고?”

“이 자식이 가장 아픈 곳을!”

내일모레면 떠나는 친구를 즐겁다는 듯 바라보던 해이가 우는 척을 하는 도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의 말을 속삭였다.

“남자가 돼서 와라.”

우는 척을 했던 도원의 눈가에 정말로 눈물이 고이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원은 제 앞에 놓인 소주를 말은 500리터의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

새벽까지 이어지던 술자리를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온 남잔, 곧장 땀에 전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욕실로 들어섰다. 시원하게 몸을 씻어내던 그가 당황한 얼굴이 되어 다시 화장실 바깥으로 나온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거품이 그대로 묻어있는 머리를 한 채로 대강 아래 바지만 주섬주섬 챙겨 입은 해이는 그대로 집을 나와 302호 집 앞에 섰다. 지금이 몇 시인지, 제 옷 상태가 어떠한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초인종을 여러 차례 눌러도 반응이 없으니, 그가 이내 쾅쾅 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302호는 화들짝 놀라 문 쪽을 응시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두드리는 상대의 태도에 여자의 눈이 불안감으로 매우 흔들렸다.

“계세요? 늦게,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급해서요. 저 옆집에 사는 학생이에요.”

침대 시트를 꽉 움켜잡고 있던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 순간 안도감과 불편함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재이는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혹여나 학생이 또 문을 무지막지하게 열어젖힐까 봐 급히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하의만 간신히 걸쳐 입은 옆집 학생이 한쪽 눈만 떠올린 채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아, 정말 죄송해요.”

그의 머리에서부터 차마 헹구지 못한 하얀 거품이 이마를 따라 눈 안쪽까지 흐르기 직전이었다.

“악. 따가워. 제발 화장실 좀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갑자기 물이 안 나와서요.”

어안이 벙벙했지만, 도와줄 수밖에 없는 몰골이었다. 옆집 사람은 버티고 서있던 몸을 옆으로 비켜서며 학생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거품이 눈에 들어간 여파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인지 두 손을 휘저으며 조금씩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버벅대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오고 나선 곧장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몸에 묻은 거품들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다 씻고 거울을 확인하니 아직도 따끔거리는 오른쪽 눈이 조금 붉어진 게 보였다.

‘이건 뭐지?’

화장실 선반에서 수건을 꺼내 몸을 닦아내던 중, 열린 선반 안에서 갈색 종이봉투를 발견한 학생이 무심결에 그 안을 살펴봤다.

많은 양의 현금이 잘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봉투 안에 쑤셔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 놀란 듯 눈이 커졌으나 곧 별일 아닌 것처럼 표정을 정리했다.

몇 분이 지나 멀끔한 모습의 그가 하의만 덜렁 입은 채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재이는 거실 테이블 위, 작은 조명만 켜놓은 채 텔레비전을 보다가 학생을 발견하곤 엉거주춤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물이 안 나와서 당황했거든요.”

“...네.”

학생은 그녀가 정말 말수가 없는 여자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 웃통을 벗은 상태의 남자를 보고도 옆집 사람은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않았다.

“혹시나 당신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와요. 새벽이라도 괜찮아요.”

너스레를 떨며 시원하게 미소를 짓던 남잔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찾아 신고 제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오니, 화장실 문 앞에 대강 벗어놨던 옷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평소엔 눈도 못 마주치더니, 오늘따라 사람 눈을 빤히 봐.”

혼자 구시렁거리며 그가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주워 세탁기에 던져넣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오라는 자신의 말에 빤히 제 눈을 들여다보던 옆집 사람의 눈빛이 돌연 떠올랐다. 순간, 상황을 구분 못 하고 뛰어대는 제 심장에 그가 당황한 듯 손으로 가슴 부위를 꾹 눌렀다.

“...뭐지. 왜 그렇게 쳐다봤지?”

그 시선은 일말의 기대감이었다. 정말 옆집 학생이 저를 구원할 수 있을까, 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대를 걸어보는,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그런 기묘한 눈빛이었다.

...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학교 근처 공원을 뛰며 최근 복잡했던 머릿속을 정리했던 그는 가뿐한 발걸음으로 집 계단을 올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깨끗하게 몸을 씻고 집 안 한편에 쌓여있는 분리수거 감과 쓰레기를 한 뭉텅이 가지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분리수거대에서 누군가를 발견한 그의 얼굴이 일순 난처한 표정이 됐다. 요 며칠간 제 머리를 복잡하게 했던 주인공이었다. 사내는 앞머리를 축 내리고 음울한 표정의 옆집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안녕하세요.”

가까운 거리에서 인사하는데도 상대는 마치 못 들은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제 발끝만 응시하는 꼴이 여전히 사회성이 없는 태도였다.

‘하여튼 음울해.’

속으론 그리 생각하면서도 학생이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그제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여잔 기웃기웃 무언가를 찾는가 싶더니 이내 골목 어귀 끄트머리에 쭈그리고 앉아 새끼 고양이에게 데운 우유가 든 그릇을 내밀었다.

“옆집에 사는데 마주치면 인사 정돈해요. 이웃사촌이잖아요.”

한 번도 저를 먼저 아는 척해주지 않는 옆집 사람에게 기분이 나빴다면 그냥 저도 모른 척 들어가면 그만인 것을. 해이는 굳이 고양이에게 먹어를 주는 옆집 사람에게 다가가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을 다소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커튼은 다 쳐놓고 고양이 오는 건 어떻게 알고 이렇게 매번 나와요?”

어느새 제 곁에 함께 앉아 있는 학생을 잠시 응시하던 재이가 손가락으로 제 원룸 거실 창을 가리켰다.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린 그가 이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블라인드가 아주 살짝 걷혀있는 것이 보였다. 그건 아마도 새끼 고양이의 동태를 확인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서로 비밀 하나씩 공유할까요?”

학생의 다소 뜬금없는 제안에 재이가 그를 응시했다. 긴 앞머리 틈새로 여자의 까만 동공이 보였다. 해이는 그 눈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상대도 굳이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아서 두 사람의 시선은 그렇게 제법 긴 시간 동안 얽혀있었다.

“...좋아요.”

거절할 것 같았던 상대에게선 의외로 긍정의 답변이 돌아왔다. 은근히 긴장했던 모양인지 여자의 대꾸가 나오자, 해이의 막힌 숨이 작게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302호로 함께 들어갔다. 옆집 사람의 거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마치 불건전한 무언가를 행하기 전처럼 배덕감이 몰려들어서 해이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가 괜스레 집 안을 둘러보며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았다. 옆집 여자는 그사이 주전자에 우유를 데웠다. 데운 우유를 잔 두 개에 나눠서 따른 뒤 그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학생 맞은편에 앉으며 컵 하나를 내밀자, 그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난 버려진 고양이가 아닌데요?’라고 말을 하려다가 문득 302호 문을 처음 두드렸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에 미세하게 맡았던 우유 냄새를. 아마도 우유를 좋아하는 여자인 듯했다.

그렇다곤 해도 한여름에 데운 우유라니. 특이하네.

“우유를 좋아하세요?”

“......그런가 봐요.”

질문을 통해서 제 취향을 안 사람처럼 재이의 대답은 매우 느리게 나왔다.

그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가 다시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이렇게 옆집 사람과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간의 음울하고 냉랭했던 여자의 태도를 생각하면 놀랄만한 일이었다.

“좋아하는 게 뭐예요?”

“...좋아하는 거?”

살면서 처음 듣는 질문인 듯 재이의 입에서 이렇다 할 대답이 내뱉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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