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의 모든 챕터: 챕터 51 - 챕터 60

108 챕터

제51화

시간이 흐를수록 어느새 조각상의 형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는 은하.조용한 공간에서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가볍게 울려 퍼졌다.원장님의 얼굴에 확신의 미소가 떠올랐다.‘역시, 감각이 있네.’첫 수업이었지만, 은하는 이미 그림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연필이 멈췄을 때, 비로소 은하의 첫 데셍이 완성되었다. 그림 속 원기둥과 구는 어딘가 거칠지만, 확실하게 입체감이 살아 있었다. “바로 데셍 수업부터 들어가도 되겠다. 그리면서 어땠어?”“그냥… 아무 생각 없었어요.”“그래. 늘 답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돼. 눈에 보이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하다 보면 정답을 찾을 때도 있는 거니까.”첫 수업이 끝나고, 은하는 사물함에 도구들을 정리하며 다시 한 번 스케치북을 펼쳐보았다.자신의 손 끝에서 완성된 그림이라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대하지 못한 칭찬 때문일까? 아니면, 뒤늦게 뭔가가 하고 싶어졌다는 그 이질적인 기분 탓인가.평소와 다르게 설레이는 가슴을 부여잡고는 학원 문을 나섰을 때, 눈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젠장, 또 백이현이다.가로등 불빛 아래, 이현은 특유의 느긋한 태도로 서서 은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끝났냐?”“넌 왜 또 여기 있는 건데?”“그냥. 지나가는 길.”너무나도 뻔한 거짓말이었다.여긴 주택가 방향도 아니고,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이상 지나칠 이유가 없는 곳인데. 그것도 보란듯이 서 있었잖아?더 이상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은하는 차갑게 그 앞을 지나쳐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이현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와 걸음을 맞추기 시작했고, 은하는 그런 이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왜 따라와?”“같은 방향이잖아.”“아니거든?”“같은 방향 맞거든? 내가 어디 사는지 알기나 해?”짜증이 올라오는 걸 느끼면서도 다시 신경을 끄기로 택했다.이렇게 자꾸 무시하다보면, 언젠가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가겠지. “강은하. 너 그림 잘그려?”“말 걸지 마.”“대답 안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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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은하는 두 손을 꽉 쥐며 이까지 악물었다.지금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우주는 이현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다행이네. 은하도 얼른 들어 와.”“오빠!”절대 안된다는 듯 우주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말려 봤지만, 대문은 이미 열려 버렸다.너무도 뻔뻔하게 대문을 넘는 백이현. 그보다 더 얄미로운 목소리까지.“좋네요. 닭볶음탕이 인연을 맺어주다니.”순간, 이 집을 나가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결론은 저녁을 먹지 않는 것. 저 자식이랑 같이 밥을 먹느니, 차라리 굶는 게 낫다 싶었다.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니까.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하며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나, 밥 안 먹어.”“은하야?”우주는 당황했고, 은하는 단호했다.쾅! 방문을 평소보다 세게 닫고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어쩜 저렇게 능청스럽고 뻔뻔하지? 왜 자꾸 신경을 박박 긁어대지?화를 못 이겨 발만 동동 구르는 은하와 달리, 주방에서는 우주의 손이 바삐 오갔다.“금방 차려줄게. 은하는 곧 나오겠지 뭐.”“네. 형님.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가 가득합니다.”조용하기만 한 방 안,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무심코 화면을 바라본 은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내용 상 백이현이 틀림 없었다.[나, 형님한테 솔직하게 다 말씀 드릴 거야.]‘얘 뭐라는 거야? 뭘 얘기해? 미친 거 아니야?’순간적으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핸드폰을 단단히 쥐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문을 열었다.이미 주방 식탁엔 우주와 이현이 마주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주가 부드럽게 웃었다.“얼른 앉아. 은하야.”은하가 쿵쿵 거리며 우주 옆에 자리를 잡은 순간, 이현이 벌떡 일어나더니 난데 없이 무릎을 꿇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우주는 누구보다 당황했고, 은하 역시 멍해졌다.그리고, 이현의 입이 열렸다.“형님, 사실 제가요….”“갑자기 왜 그래 너...! 얼른 일어나,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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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우주가 이현의 앞 접시 위에 닭볶음탕 한 조각을 올려주었다. 그것도 튼실한 다리로 말이다.“은하는 내가 따로 챙겨주면 돼. 어서 먹어.”“감사합니다. 형님. 잘 먹겠습니다. 형님!”방으로 돌아온 은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백이현이 왜 저러는 건지 이유를 몰랐다. 오빠의 반응도 짜증이었다.당장 백이현을 쫓아내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고맙다고? “하….”그러다 방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미묘한 대화 소리가 귀에 스쳤다.순간, 참을 수 없는 궁금증에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모르게 문 앞까지 다가가서는 귀를 바짝 갖다 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였으니까.“설희한테 들었어. 웬 남학생 두 명이 하루 종일 은하를 지키고 서 있었다고. 한 명은 태하겠지?”“네. 태하랑도 친합니다. 그리고, 말씀 드렸다시피 저 싸움 되게 잘합니다.”“푸하, 태하는 항상 진중해 보이던데, 둘이 성격이 되게 다르구나?”그럼요, 완전히 정 반대입니다. 따지고 보면 제 성격이 더 나은 쪽이라 확신합니다.“태하는 약간 선비 스타일이고, 저는 자영 스타일입니다.”“자영? 자영이 뭐야?”“자유로운 영혼입니다. 형님.”한 번 터진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능청스럽고 장난스러우면서도 영 거짓은 보이지 않아서, 내 뱉는 말 하나 하나가 우습고 귀여운 녀석은 처음이었다.그래서 그런지, 우주의 머릿속엔 자꾸만 물음표가 떠 다녔다. 태하도 마찬가지였지만, 이현이 마저 은하를 왜 이렇게 챙기나 싶어서.“이현아, 형이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그럼요!”“은하한테 잘 해주는 이유가 뭐야? 혹시, 은하가 아파서? 아니면 미안해서?”짧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은하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본능적으로 신경이 쓰였던 것도 사실이다. 아프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지금은 왠지 솔직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요.”“그럼 왜?”“예쁘잖아요.”“뭐?”“강은하요, 처음 전학 온 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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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이현아. 형이, 부탁 하나 해도 될까?”“네.”우주의 눈빛이 꽤나 진중해졌다.지금까지의 가벼운 대화와는 달리 지금은 의사로서, 그리고 은하의 오빠로서 하는 진지한 부탁이었다.“네 말대로 라면, 은하는 지금 스스로도 모르는 또 다른 트라우마 반응을 나타낼 가능성이 있어. 그리고 그건, 아주 사소한 순간에도 튀어나올 수 있고.”이현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이제 그에게도 쉽게 넘기기 어려운 단어였다.“만약 은하가 갑자기 심하게 경직되거나, 숨을 제대로 못 쉬는 것 같으면 우선 주변 상황을 조용하게 만들어 줘야 해. 특히 사람이 많거나 시끄러운 환경이면 더 불안해질 수 있으니까, 가능하면 조용한 곳으로 이동 시키는 게 좋고.”“잠시만요 형님. 저 핸드폰에 메모 좀 해도 될까요?”“그래.”이현은 핸드폰을 꺼내, 우주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은하가 괜찮다고 말해도, 정말 괜찮은 건지 확인해야 해. 불안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경우가 대다수야. 특히나 은하는… 그럴 가능성이 훨씬 더 높고.”이현은 그 말에 누구보다 공감했다. 그동안 봐왔던 은하는 이미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걸 극도로 꺼리는 성격이었다. 괜찮다는 말도 늘상 버릇처럼 해왔던 것 같고. “제가 알기로는, 은하가 힘들어하는 소리가 철문 닫히는 소리랑 천둥소리라고 알고 있는데. 혹시 또 조심해야 하는 게 있을까요?”“응. 어둡고 좁은 공간도 힘들어 해.”이현의 숨이 거칠어졌다. 공간, 소리, 어둠. 그 모든 걸 힘들어하는 인생을 그동안 어떻게 버텨온 걸까.“그럼, 혹시라도 그런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죠?”“공간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증상이 나타나면 약을 먹어야 하는 상황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는데… 그건 아마 쉽지 않을 거야. 다행히, 은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고.”“그래도 말씀해주세요.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증상이 하나만 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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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등교 내내 은하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지만, 어제 저녁 우주와 대화를 나누던 이현의 목소리가 자꾸만 맴돌았다. ‘예쁘잖아요.’저도 모르게 제 옆에서 발걸음을 맞추는 이현의 옆모습을 힐끗 보고는, 이내 머리를 흔들며 모든 생각을 털어내려 애썼다.“왜? 머리 아파?”“아니거든? 신경 꺼.”학교와 가까워지자, 두 사람의 눈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태하였다.그는 늘 그렇듯 단정한 모습으로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시선은 은하와 이현을 번갈아 바라 보았고.은하는 순간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하지만 그보다 더한 긴장감을 느낀 사람을 따로 있었다. 바로, 백이현.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청스럽게 손부터 흔들었다.“오, 정태하! 오늘은 등교가 늦다?”자리에 뚝 멈춰선 태하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뭐냐고. 시험 기간엔 일찍 와서 공부하는 거 아니었어?”“아까 와서 공부 했어. 지금은 은하 마중 나온 거고.”“아, 그래?”이상하게 긴장감이 흐르는 기류가 은하에겐 너무나도 불편했고, 결국 교문 안쪽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이현은 자연스레 은하의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태하의 손이 그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나랑 얘기 좀 해.”“뭐냐. 갑자기 심각한 척.”결국 운동장 근처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태하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시작했다.“너,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이제 와서 은하를 지켜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왜? 안돼?”“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 그새 다 잊었어?”이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침착하게 대답했다.“안 잊었어. 그래서 어제 은하 오빠한테 가서 사과도 드렸고.”“…뭐?”“어제 강은하네 집 가서 저녁 먹었거든. 그리고 정태하, 너야말로 좀 이상하다?”“내가 뭘.”“너 혹시, 강은하 좋아하냐?”태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하나 만으로 이미 충분했다.‘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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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급식실을 나서던 중, 이현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길게 진동햇다.아무 생각 없이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이현은,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그리고는 은하 옆으로 다가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장착했다.“매점 갈래? 초코우유 사줄까?”“뭐래. 녹은 초콜릿 같이 생긴 게.”은하의 대답에 태하는 웃음을 참으며 큭큭거렸고, 민희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대박, 녹은 초콜릿이래! 푸하하하.”그때, 은하의 눈에 한 남학생들 무리가 포착됐다. 얼마 전, 박찬희와 함께 창고 사건에 가담한 학생들이었다. 교내 봉사를 하며 한동안 은하를 피해 다니던 그들 역시 예상하지 못한 듯 우물쭈물 대기 시작했다.대장이 없어진 지금, 그들은 나약하기 그지 없었다.하지만, 자리에 멈춰 선 은하가 돌처럼 굳기 시작했다.“은하야, 왜 그래?”“은하야?”이현은 그들의 눈을 매섭게 노려보며 입술까지 짓씹었다. 당장 눈 앞에서 꺼지라는 뜻.무리들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고, 이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녹은 초콜릿은 좀 심했다. 나 매점 안 가. 흥.”잠시 후, 이번에는 태하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이영주.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어, 왜?”“야, 백이현은 이제 내 전화도 안 받더라?”“왜 전화 했는데?”“나 아빠가 유학 가래. 근데 가기 싫단 말이야. 니들이 좀 도와줘라. 응?”“할 말 없어. 끊는다.”한편, 은하의 앞 자리에 앉은 민희는 등까지 돌려가며 속닥거렸다.“은하야. 백이현 말이야, 요즘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몰라.”“예전엔 이 사람 저 사람 시비만 걸고 다니더니, 확실히 온순해 진 것 같아.”“온순은 개풀. 몰라. 짜증나.”“근데, 넷이 친구 하자는 거. 생각해보니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민희야… 너까지 진짜 왜 그래?”“그렇잖아. 태하는 워낙에 착한 애고, 백이현도 덩달아 착해 지려는 거면 뭐.”“…휴. 난 모르겠다.”친구라는 단어는 어차피 애초부터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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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이번엔 태하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백이현. 아까 아침에 했던 얘기 말이야. 네 말 듣고, 나도 생각을 좀 해봤는데.”“아오, 이 선비. 또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끙끙대고 있었냐?”“…그냥. 내가 너무 한심해서.”역시나 태하는 태하였다. 늘 진중하고, 속은 깊은 걸 넘어 답답하고. 또 스스로를 얼마나 괴롭혔을까.“왜그래. 그러라고 한 말 아닌 거 뻔히 알면서.”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리고, 이번엔 태하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강은하 처음 전학 오던 날, 우리 반에 걔가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 설렜어.”“야. 정태하….”이현은 태하의 마음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직접 듣는 건 분명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창고에서 처음 알았어. 네가 강은하한테 보였던 관심이, 장난이 그저 호기심이 아니라는 걸. 그때부터 네가 조금씩 미워졌던 것 같아.”“웃기시네. 나도 가끔 너 마음에 안 들거든?”“네 말대로 우리 친구잖아, 그러니까 은하한테도 좋은 친구가 돼주자. 그게 맞는 것 같아.”“…그래. 일단은.”일단이라는 뜻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이번엔 이현이 주도권을 쥐었다.“어제, 우주 형님이 은하 상태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셨거든?”“형님…?”“아 어.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거 봐봐.”핸드폰 메모장을 연 이현은, 우주의 말을 옮겨 메모한 내용을 띄워 내밀었다.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던 태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그럼, 은하가 쓰러졌던 두 번 다 심각한 상황이었다는 거네?”“응. 너도 알고 있어야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지.”“철제 문이랑, 천둥소리만 그런 게 아니었어?”“응. 어둡고 좁은 공간도 조심해야 하나 봐.”“…생각보다 심각하네.”잠시 뜸을 들이던 이현이 한 가지 이야기를 더 전해주었다.“그리고 하나 더. 그 창고 사건 이후로, 교복 입은 남학생 무리들을 보면 숨거나 몸이 굳어.”“……뭐? 학교에 교복 입은 남자애들이 한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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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은하는 자꾸만 반복되는 이 상황에 모든 걸 포기한 듯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이 뒤를 따르고 있다니.“야. 강은하. 우주 형님은 어쩜 요리도 잘하시냐?”“…….”‘무시하면, 스스로 질려서 멈춰주겠지.’“오늘도 마중 나와 주셨으면 좋겠다. 태하도 같이 밥 먹게.”미쳤구나? 한 번도 짜증이 솟구쳤는데 뭐? 밥? “헛소리 좀 그만해.”대꾸는 차갑게 내뱉었지만, 왠지 모르게 느낌이 쌔해진 은하는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오빠. 오늘은 절대 마중…]끝까지 입력되기도 전,“어허! 강은하.”이현의 손이 순식간에 핸드폰을 가로채 버렸다.“지금 형님한테 문자 보내는 거지? 생각보다 치사한 구석이 있네?”“뭐 하는 거야! 핸드폰 내놔!”곧장 이현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철딱서니 없는 초딩처럼 은하의 핸드폰을 머리 위로 들고 웃으며 뛰어가는 백이현. 은하는 이를 악물며 그를 쫓아갔다. 태하 역시 잠시 자리에 멈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이내 소리쳤다.“야! 같이 가!”난데 없이 길 한복판에서 추격전을 벌이기 시작한 세 사람.그들을 천천히 따라가던 검은색 세단 두 대가 멈춰 섰다. 먼저 선 자동차에서 이현의 비서인 박 비서가 내렸고, 뒤이어 태하의 비서, 최 비서가 모습을 보였다.“최 비서님. 또 뵙네요.”“박 비서님. 자주 뵙습니다.”두 사람은 아직도 거리를 달리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요즘 따라 느끼는 건데… 청춘이라는 거, 참 보기 좋지 않습니까?”“그러게요.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아름다운 청춘이지요.”전속력으로 달린 이현이 은하의 집 앞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그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인물을 발견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흔들었다.“형님!!”오늘도 은하를 마중나온 우주. 그의 눈길에 상황을 파악하듯 빠르게 움직였다.미간을 찌푸린 채 달려 오고 있는 은하와, 히죽 읏으며 함께 뛰는 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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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결국 네 사람의 저녁 식사가 강제적으로 시작되었다.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사람이 늘어났고, 은하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현과 태하는 허겁지겁 ‘맛있다’를 연발하며 음식을 욱여 넣었고, 은하는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며 깨작거렸다.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은, 둘이 같이 은하 데려다 준거야?”태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현이 밥을 한 숟가락 가득 떠넣으며 대답했다.“네.”“착하네. 둘 다.”“형님, 저희가 호칭을 한 번 정해봤습니다.”“응? 호칭이라니?”이현이 능청스럽게 태하의 어깨를 툭 쳤다. “야, 정태하. 네가 말 해.”젓가락을 손에 쥔 태하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쑥스러운 듯 중얼거렸다.“…CCTV요….”“CCTV? 그게 무슨 소리야?”“강은하 전담 CCTV요.”“푸흡...!”은하의 입에서 순식간에 밥풀이 튀어 나갔다.태하는 놀란 듯 멈칫했고, 우주는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장 어이가 없던 건 이현이었다. 그는 아주 태연하게 자신 쪽으로 튄 밥풀을 보고도 능청스럽게 휴지를 뽑아 닦아냈다. “강은하. 사람 면전에 대놓고 밥풀 쏘는 거… 진짜 실례야.”은하는 씩씩거리며 분을 주체하지 못한 듯 보였지만, 세 사람은 연신 웃으며 식사를 이어갔다.그러다 끝나가는 분위기에 맞춰,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다 먹었으면 이제 돌아들 가.”하지만 우주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을 보낼 생각이 없어 보인 달까.“과일 깎아줄까?”“형님은 왜 제 형이 아닐까요? 그 사실이 개탄스럽습니다.”은하가 분노를 억누르며 태하를 향해 마지막 희망을 내비쳤다.“태하야. 너라도 정신 차려.”“…응? 왜? 디저트는 먹고 가야지.”“하….”이미 과일을 깎기 시작한 우주가 덧붙였다.“친구들 재미있고 좋은데 왜.”이현이 능청스럽게 맞장구쳤다.“맞아. 이젠 받아들여. 우리는 강제 패키지야.”강제 저녁 식사에 강제 디저트 타임으로도 모잘라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상황인가?한계치에 도달한 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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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서슬퍼런 분노를 느낀 이현과 태하는 오늘은 이만 물러나 주기로 결심 했다.빠르게 소파 위에 놓인 가방을 챙겨 일어나자, 우주는 그런 둘을 배웅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발을 신던 이현이 우주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형님! 그럼 전화 드리겠습니다.”“네가 왜 우리오빠한테 전화를 해?”“은하양.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침에 모시러 오겠나이다.”“빨리 꺼져라 진짜.”내내 부드럽던 우주의 표정이 찌푸려졌다.“은하야! 친구한테 누가 그런 말을 해.”“됐어. 다 나가!”마지막으로 태하가 은하의 눈치를 살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우주 형님. 오늘 저녁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래. 태하도 잘 가고, 또 보자.”“형님, 가보겠습니다!”“응, 들어가.”그들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은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주를 향해 다그치기 시작했다. “오빠, 진짜 어제 오늘 왜 이러는 건데?”우주는 생글생글 웃으며 식탁으로 향해 정리를 시작했고, 은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쪼아댔다.“진짜 왜 그러냐고! 오빠까지 저 자식이랑 합세해서!”“좋으니까.”“뭐가? 백이현이?”“잠깐 앉아봐.”갑자기 진지해진 목소리에, 은하는 입을 꾹 다물고 식탁에 앉았다.우주가 그런 은하를 바라보며 진심을 전하기 시작했다.“요즘 오빠는 너무 너무 좋아.”“그러니까 뭐가.”“네가 친구들이랑 뛰어노는 모습이 제일 좋았고, 그 친구들한테 맛있는 음식 해주는 것도. 그냥 다 좋았어 오빠는.”“…….”“그동안 너무너무 하고 싶고, 보고 싶었던 일들이야.”은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을 아꼈다. 그저 묵묵히 모든 걸 해주는, 자신을 위해 당연하다는 듯 희생하는 오빠였는데.그런 오빠가 지금, 벅차 오른 감정을 솔직하게 흘려내고 있었다.심지어 그 감정은 고작 너무도 평범한 일들이란 사실에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찌릿했다. “은하야. 너도 잘 생각해봐. 이현이랑 태하가 정말 못되고 나쁜 아이들이라고 생각해?”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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