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자, 비로소 내가 사랑을 알았다의 모든 챕터: 챕터 201 - 챕터 210

289 챕터

제201화

이담의 미모가 너무나도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신랑이 지능이 낮은 이 집의 노총각 아들이라는 건 마을 사람들 모두 알고 있었다.아무리 집안 형편이 좋다고 한들 나이 많은 지적 장애가 있는 남자에게 시집오려는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그런데도 저렇게 예쁘장한 젊은 처녀를 데려왔으니 다들 의심할 수밖에.혹시 어디서 강제로 데려온 불쌍한 아가씨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애초에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수군거림을 눈치챈 강수연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심이담이에요. 우리 민철이 딸이거든요.”“민철이 딸이라고?”한 노인이 이담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숙자를 향해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참 어린애한테 너무하기도 하네.”이숙자는 코웃음을 쳤다.“다 큰 계집애가 시집가는 건 당연한 건데, 아까울 게 뭐 있어?”노인은 길게 혀를 끌끌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남의 집안일에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색시, 내 색시!”새신랑 복장을 한 남자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절뚝절뚝 다가왔다.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얼굴 반쪽은 마비되어 있었다. 말할 때발음도 어눌했고 지적 능력은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강수연이 해준에게 살갑게 다가갔다.“해준아, 이제부터 이 애가 네 색시니까 아껴줘야 한다!”“색시 아껴! 나 색시 아낄 거야!”해준은 헤벌쭉 웃으면서 입가에 침까지 흘렸다. 이담을 빤히 바라보던 해준은 나름 수줍은 기색까지 띠었다.“예뻐.”이담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주변에서 무슨 말이 오가든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애초에 정신은 이 혼사 자리를 까마득히 벗어나 있었다.그러다 마침내 빈틈을 노렸다. 사람들이 해준을 부축해서 이담의 곁으로 다가오는 순간, 이담은 망설이지 않고 해준을 거세게 밀쳐버렸다.바닥에 나뒹군 해준이 그 자리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해준의 부모가 기겁하며 아들에게 달려갔다.이숙자가 이담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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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2화

진혁의 표정이 굳어지며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제 아내를 데리러 왔습니다.”‘아내라니?’해준의 아버지가 멈칫했다.“아내분이라면...”진혁이 이담을 향해 손을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리 와.”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담에게 쏠렸다.‘남의 아내라고?’‘그럼 저 인간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말도 안 되는 소리!”이숙자가 참지 못하고 나서서 가로막았다.“우리 손녀가 언제 결혼을 했다고 그래요? 다 헛소리예요!”뒤늦게 정신을 차린 강수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맞아요. 우리 조카가 결혼했다면 그 오랜 세월 동안 집안에 알리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요?”강수연이 이담을 쏘아보며 덧붙였다.“이담아, 아무리 시골에 시집오기 싫다고 해도 사람까지 불러서 이런 연극을 할 필요는 없잖니?”해준의 어머니도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애초에 심씨 집안에서 혼담을 넣을 때, 분명 아가씨가 나이도 어리고 결혼한 적도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저기요, 뭔가 단단히 오해하신 모양인데. 오늘은 우리 집안의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댁의 아내가 어떻게 우리 며느리가 된단 말입니까?”“유감스럽겠지만 저 결혼한 거 맞아요.”침묵하던 이담이 입을 열었다.“구청에 가면 제 혼인 상태를 조회할 수 있을 텐데요. 두 분 다 배운 분들이니 중혼죄가 뭔지는 아시겠죠?”해준 부모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 해준의 아버지가 강수연과 이숙자를 매섭게 노려봤다.“지금 우리 집 재산을 노리고 사기 친 겁니까?”“아닙니다, 사돈어른! 저것들 다 가짜가 틀림없어요!”이숙자가 다급히 변명하려던 순간, 안나가 차갑게 나섰다.“가짜인지 아닌지는 구청에 가서 확인해 보면 될 일 아닙니까? 그게 뭐 어렵다고요.” “게다가 심이담 씨는 마동순 회장님께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신 하씨 가문의 며느리입니다.”“이렇게 강압적으로 나오는 걸 보니, 하씨 가문의 며느리를 억지로라도 붙잡아 두겠다는 겁니까?”그 말에 강수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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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화

이담이 진혁의 품에 안긴 채 차에 오른 뒤 천천히 차문이 닫혔다.차창 너머로 바닥에 주저앉아 악을 쓰는 이숙자와 넋을 잃고 선 강수연의 모습이 보였다.굳게 닫힌 차창이 바깥의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했다.사람들이 심씨 집안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진혁의 손끝이 살짝 부어오른 뺨을 스치자, 이담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피했다. 진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담을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물었다.“왜 집에 안 들어갔어?”이담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대답했다.“나한테 돌아갈 집이 있긴 해?”“그린힐이 네 집이야.”진혁은 이담의 머리에 꽂힌 촌스러운 장식을 빼내 창밖으로 휙 던져버렸다.“싸구려 플라스틱 진주라니. 대체 돈을 얼마나 줬길래 자기 핏줄까지 팔아 넘긴 건지 궁금해지네.”이담은 주먹을 꽉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혁이 이담의 턱을 쥐고 고개를 돌리게 했다.“갈수록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드네.”“신경 쓰이게 한 적 없어.”이담이 날을 세우자 진혁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그럼 나 말고 누구를 신경 쓰이게 할 건데? 진경훈?”이담이 진혁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자, 진혁은 팔에 힘을 주면서 더 꼭 안았다.오늘따라 청초하면서도 묘하게 요염한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싸구려 티가 나는 붉은 예복조차 이담의 쓸쓸한 아름다움을 조금도 가리지 못했다.방금 전까지 이담을 탐하려던 자가 지적 장애가 있는 사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진혁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고작 제철소 하나 문 닫게 한 것만으로는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아.’그린힐에 도착하자마자 진혁은 이담을 곧장 욕실로 데려갔다. 말 없이 다가온 진혁이 이담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건드리지 마!”기겁하며 욕조 안에 주저앉은 이담은 바들바들 떨면서, 몸을 웅크린 채 악을 썼다.진혁은 굳은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시선을 돌리면서 조용히 말했다.“옷 갈아입어. 안 건드릴 테니까.”진혁이 나가고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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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4화

이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초연의 얼굴에 떠오른 노골적인 승리감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윤정이 추락한 게 전부 초연 때문이라는 것을.‘그래서 그랬구나...’‘하진혁이 경찰서에 가지 못하게 막았던 것도...’‘어머니가 왜 추락했는지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던 것도.’‘전부 문초연 때문이었어...’주먹을 꽉 쥐면서, 이담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초연이 다가와 이담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사실 나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걸 바라진 않았어요. 안타깝게도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어버리셨지만요. 이쯤 되면 그냥 어머니 팔자가 사나웠다고 탓할 수밖에요.”이담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억눌러왔던 감정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예요?”“사고라고 말씀드렸잖아요.”초연의 얼굴에는 그 어떤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분 팔자가 그랬던 거겠죠.”“우리 어머니, 하빈이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 일도 다 사고였다고 할 참인가요?”이담이 단숨에 초연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하진혁이 감싸고 도니까 뭐라도 된 것 같아요? 언제까지고 하진혁이 당신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그게 뭐 어때서요?”초연이 손을 뿌리치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평생을 지켜주진 못한다 해도, 내 일이라면 절대 모른 척하지 않아요. 이번 일도 마찬가지고요.”“입만 열면 떠나겠다고 하더니, 지금 떠났나요? 이담 씨도 하성그룹 사모님 자리가 아쉬웠던 거잖아요.” “끝까지 나와 기싸움을 하겠다는데, 내가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겠어요?”이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셨다.“그래서 우리 가족한테 손을 댄 거예요?”“당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들이니까요.”초연이 독기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이담 씨는 못 건드려도, 가족들은 건드릴 수 있잖아요? 이번 일도 당신이 자초한 거예요. 애초에 준희한테 접근하지 말았어야죠.”이담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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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5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담은 무의식적으로 과도를 놓아버렸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뒤로 뒷걸음질 쳤다.‘내가 하진혁을 찌르다니...’‘내가 정말 미쳐버린 건가?’초연이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통화 연결음이 울리기도 전에 진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상처를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진혁이 헐떡이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신고하지 마.”“진혁 씨, 이담 씨가 죽이려고 했잖아!”진혁이 이를 꽉 악물었다.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필요 없다고 했어!”초연은 다급히 상처 부위를 지혈하며 HJ병원 구급차를 불렀다.이담은 망연자실하게 선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변명도 사과도 없었고,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구급차가 도착해 들것에 실려 가는 순간까지도 진혁은 고집을 부렸다.과다 출혈로 의식을 잃기 직전이면서도, 구급대원들에게 아내가 실수로 낸 상처라며 절대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구급차에 함께 올라탄 초연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아들이 칼에 찔려 응급실로 실려갔다는 소식을 듣자, 이만옥은 혼비백산해서 병원으로 달려왔다.하지만 수술실 밖을 서성이는 건 이담이 아니라 초연뿐이었다.이만옥이 불쾌한 듯 미간을 깊게 구겼다.“네가 왜 여기 있어? 이담이는 어디 가고?”“사모님, 이담 씨가 진혁 씨를 죽이려고 했어요!”초연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악의적인 과장이 섞인 설명이었다.이담이 진혁을 찔렀다니, 이만옥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어디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제가 거짓말하는 건지 아닌지는 직접 이담 씨한테 물어보세요!”이만옥이 멈칫했다.아무리 앙심을 품고 거짓말을 한다 한들, 저토록 확신에 차서 말할 수는 없었다.‘설마 진짜로 이담이가 내 아들을 찔렀단 말이야?’“사모님, 아무리 이담 씨가 진혁 씨 아내라 해도 이건 명백한 살인미수예요. 당장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해요.”“부부 싸움도 고의 상해로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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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6화

“사고라고?”마동순이 헛웃음을 쳤다.“이담이 동생이며 부모가 잘못된 일에 전부 문초연 그 계집이 얽혀 있는데, 그걸 사고라고 믿으란 말이냐?”진혁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진혁도 의심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사람을 해칠 만큼 초연이 그렇게 악독할 리 없어.’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다.초연과 알고 지낸 지 10년, 한때는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였다.6년 전 집안의 반대 때문에 초연을 붙잡지 못했다는 깊은 죄책감도 남아 있었다.‘비록 초연이 수작을 부리고 이담을 모함하긴 했어도, 그저 치기 어린 질투일 뿐 사람 목숨을 앗아갈 정도는 아니야.’마동순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담이 너하고 결혼해서 이토록 불행해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결혼을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다. 너는 지금 이 마당에도 딴 여자 편이나 들고 있으니 말이야.”‘이혼에 동의한다고는 했지만, 내심 두 사람이 어떻게든 잘 살아보기를 바랐는데.’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허락하셨다니요? 애초에 이담이를 저와 결혼시킨 게 할머니 뜻 아니었습니까?”“할머니와 이담이가 초연이를 쫓아낼 때, 제 심정은 단 한 번도 헤아려주지 않으셨잖아요.”마동순이 멈칫하더니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초연이를 내쫓은 건 내가 맞다. 하지만 이담이는 그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이담이는 너한테 시집올 때, 네놈과 초연이 사이에 있었던 일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진혁은 병상에 기댄 채 묵묵부답이었다.“됐다. 너희 둘이 정 이혼하겠다면 그리해라. 우리 하씨 집안이 이담이에게 진 빚은 다 갚은 걸로 칠 테니.”이만옥이 경악하며 마동순을 바라보았다.“어머니, 하지만 이담이 뱃속에 우리 진혁이 핏줄이 있는데 이혼이라니요. 이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낳고...”“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이담이가 결정할 일이다.”마동순은 단호하게 말을 자르곤 지팡이를 짚으며 병실을 나섰다. 하동규가 묵묵히 그 뒤를 따라 나갔다.진혁은 창밖을 응시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안색에서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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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7화

가위 끝이 심장을 파고들기 직전, 이담은 온 힘을 다해 손을 빼냈다. 가위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미친놈!”진혁이 소리 없이 웃으며 이담을 자신의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담의 창백한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증오할 거면 계속 증오하며 살아. 나를 선택한 건 너야. 후회해도 평생 네가 감당해야 해.”이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진혁이 거칠게 입술을 짓눌러 오자, 이담은 몸부림치며 밀어냈다.진혁은 상처 부위의 통증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숨에 이담을 낚아채서 침대 위로 밀어붙였다.반항이 거세지자, 상처가 찢어지는 고통을 꾹 참으면서 팔에 힘을 주었다. 이담이 벗어나지 못하게 꼭 안은 채 진혁이 말했다.“이담아, 안 건드려.”정말 그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코끝을 맴도는 비릿한 피 냄새에 이담의 시선이 자연스레 진혁의 허리춤으로 향했다.새로 감아둔 새하얀 붕대 위로 다시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이담아.”진혁의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 아파.”이담은 끝내 시선을 외면했다.“의사 불러.”“네가 의사잖아.”이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혁 역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한참이 지나도록 두 사람 모두 미동조차 없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정말 죽은 줄 알았을 정도였다.이담은 가만히 진혁의 품에서 빠져나온 뒤 호출벨을 눌렀다. 그리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병실을 빠져나갔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진혁은 허리에 감긴 거즈가 새것으로 교체된 것을 발견했다.이담이 갈아준 거라고 생각하자, 진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그래도 양심은 있네.’때마침 도우미 아주머니와 함께 아침 식사를 들고 병실로 들어온 이만옥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독 이담만 보이지 않았다.“어디 갔어요?”“누구?”이만옥은 뻔히 알면서도 코웃음을 쳤다.“이담이 말하는 거니? 걘 어젯밤에 진작에 집에 갔어. 네 곁에 있지도 않았다고.”진혁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어쩜 애가 그리 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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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8화

이담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안내해 주세요.”종업원이 2층으로 이담을 이끌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경훈의 시선은 정확히 이담을 향해 있었다.종업원이 자리를 비켜주자, 경훈이 변함없는 미소를 띤 채 바라보았다.“뭐 좀 마실래? 이 집 꽃차가 꽤 괜찮은데, 한 잔 마셔볼래?”“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맞은편 자리에 앉은 이담은 평소보다 한결 선을 긋는 깍듯한 태도였다.“아무것도 안 마실게요.”경훈이 시선을 내리깔았다.“네가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겠어. 미안해. 어머니 일은 나도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이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고개를 들어 경훈을 마주 보았다.“다 지난 일이에요.”너무도 평온한 말투였다. 마치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경훈은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담아, 내가 이야기 하나 들려줄게.”경훈이 찻잔을 꽉 쥐곤 생사를 함께한 두 전우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편의상 A와 B라고 부르겠다고 하면서.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친형제보다 더 끈끈한 사이였다.A는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이었지만, 배경이 없는 B를 무시하지 않았다.B의 눈에 비친 A는 흔히 보던 재벌가 자식들과는 달랐다. 오히려 예의 바르고 따뜻하며 책임감 넘치는 사내였다.두 사람은 속내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고, A는 B가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다.B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남몰래 A를 짝사랑하고 있었다.A 역시 여동생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여동생은 A의 엄청난 집안 배경 탓에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하지만 A는 어떻게든 집안을 설득해서 여동생을 아내로 맞겠다고 굳게 약속했다.B의 묵인 아래 두 사람은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랑을 키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은 아이를 가졌다.경성으로 돌아간 A가 약속을 지켜서 여동생과 아이를 곧 데리러 올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번 떠난 A는 그 길로 감감무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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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9화

한참을 침묵하던 이담은, 앞서 경훈이 하씨 가문 어르신들과의 악연을 언급했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그럼 A가 하씨 집안 사람이에요?”“맞아.”경훈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B가 우리 외할머니의 친오빠고, 그 여동생이 우리 외할머니야. 그리고 그 갓난아기가 바로 우리 어머니고.”이담은 경악했다. 경훈의 어머니가 하씨 가문의 핏줄이라니.‘만약 하씨 가문에서 인정했다면, 선배 어머님은 진작에 하씨 가문의 장녀가 되셨을 텐데.’“그런데 왜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널 이용하려고 했던 거 인정해.”경훈이 갑자기 이담의 손을 꽉 쥐었다.“하지만 이담아, 그 뒤에 곧바로 후회했어. 너와 어머님이 날 가장 믿어주셨을 때부터 뼈저리게 후회했어. 더 이상 너한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어.”“그래도 결국 저를 속이셨잖아요.”경훈은 말문이 막혔다. 이담이 손을 빼내면서 손 안의 온기도 스르르 빠져나갔다.“경훈 선배. 사실 선배한테 참 고마웠어요. 비록 절 이용하셨어도, 저와 우리 어머니를 도와주신 건 사실이니까요.”“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이제 더는 선배 도움을 받을 일도 없을 거예요.”말을 마친 이담이 자리에서 일어나 레스토랑을 나섰다.“이담아!”경훈이 다급히 뒤쫓아 나갔지만, 복도에 들어섰을 때 걸려 온 전화가 발목을 잡았다.처음엔 무시하려고 했지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고 경훈은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 이담은 이미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였다....경훈이 향한 곳은 초연이 머무는 호텔 객실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초연이 다가와 목에 팔을 두르며 안겼다.“하씨 집안의 그 노인네가 날 정직시켰어요. 진 대표님, 그 노인네 숨통 끊어놓을 방법은 정말 없는 거예요?”초연이 입을 맞추려던 순간, 경훈이 매몰차게 밀쳐냈다.휘청거리던 초연은 벽에 거칠게 부딪혔다. 얼얼한 몸을 겨우 추스른 초연이 고개를 돌리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진경훈 씨, 미쳤어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경훈이 초연의 목을 꽉 틀어쥐고 벽으로 밀어붙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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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0화

초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혹여라도 이 타이밍에 경훈이 방에서 나올까 봐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문 과장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그게...”머리를 굴리던 초연이 재빨리 핑계를 댔다.“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호텔에 와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저혈당이 와서 쓰러진 거예요.”경호원이 다가와 부축하며 등 뒤의 룸 번호를 확인했다.“이 방에 묵으십니까?”경호원이 문을 열려고 하자, 초연이 다급히 막아섰다.“안 그러셔도 돼요.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그나저나 두 분은 여긴 어쩐 일이에요?”두 경호원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차마 털어놓기 곤란한 기색이었다. 초연도 굳이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참, 진혁 씨는 좀 어때요?”“대표님은 괜찮으십니다.”짧게 대답한 경호원이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별일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초연은 속으로 제발 빨리 가주기만을 바랐다. 경호원들이 멀어지자,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경훈이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날 방패 삼으려고 일부러 밖으로 내보낸 거였어.’“이번 일은 경고입니다.”경훈은 싸늘한 시선을 던진 뒤 발걸음을 옮겼다.벽에 기대고 있던 초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대체 내가 어디가 부족하단 말이야.’‘한때 하진혁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고, 막대한 돈을 쏟아붓게 하며 독점하기도 했어.’ ‘내가 갖고 싶은 걸 놓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원하는 건 언제나 계산대로 손에 넣었는데.’‘귀국해서도 예전처럼 다 내 손아귀에 넣고 주무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심이담이 그 완벽했던 계획을 산산조각 내버렸어.’‘하진혁은 대놓고 심이담을 감싸기 시작했고, 그저 심이담을 이용할 생각뿐이던 진경훈조차 온통 신경을 쏟고 있잖아.’속이 뒤집힐 만큼 끔찍하게 불쾌했다.경훈을 놓친 경호원들은 빈손으로 병원에 돌아가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진혁은 병상에 기대앉아 서류를 훑어보았다. 곁을 지키던 안나가 침묵하는 진혁을 대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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